Chủ Nhật, 12 tháng 5, 2019

[ 서울 ] 2017 종로기행 … 5. 탑골공원 - ② 3.1운동의 성지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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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 2017 종로기행 … 5. 탑골공원 - ② 3.1운동의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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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7. 8. 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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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 2017
종로기행  5. 탑골공원
(사적  제354호) - 3.1운동의 성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2가 38-1



탑골공원은 크게 세 가지 역사가 중첩되어 있는 복합 사적지다. 먼저 첫번째로는 우리가 앞서 살펴본 바. 이곳이 옛 원각사의 터라는 거다. 이미 OO寺址 라는 이름으로 많은 절터들이 사적으로 지정되어있음을 감안할 때(고달사지, 회암사지, 성주사지…)... 국보급 문화재까지 있는 이곳이 사적이 되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다.

두번째로는, 공원 자체가 이 나라 최초의 근대공원으로서 역사적 가치를 갖는다는 거다. 이 사실은, 단순히 전에 없던 무언가가 처음으로 생겼다는 최초 프리미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대개 근대공원의 태동 배경으로 두 가지 이유를 든다. 하나는 지배계급이 보다 원활한 착취를 위하여 피지배계급의 보건 문제에 신경을 쓰게 되고, 그 산물 중 하나가 공원이라는 거다. 다른 하나는 피지배계급의 분화로 시민계층이 등장하면서 이들의 제몫찾기 일환으로 공원이 등장했다는 거다. 어느 쪽의 해석을 따르던...

봉건 조선 사회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이 나라 최초의 근대공원이 역사 속에서 갖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곳 파고다공원이 '사적'인 마지막 이유는.. 이곳이 3.1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이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조금 더 풀어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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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에서 바로 만나는 3.1운동 기념탑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여 전 민족이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으로 일제 강점기에 나타난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의 식민지에서 최초로 일어난 대규모 독립운동이라는 세계사적 의미를 갖기도 하다.

3.1운동의 배경을 크게 내적/외적으로 나눠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내적인 배경은 일제의 무단통치(武斷統治)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은 1910년 한일합방을 통해 조선을 강점한 뒤 군사력을 배경으로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의 각 분야에서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을 자행했다. 한 마디로 초반부터 싹을 밟아버리겠다는 주의다. 그들이 간과한 점은, 밟아도 죽지 않는 질경이같은 싹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내적 갈등에 기름을 부은 것이 외적 배경, 즉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다. 미국의 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천명한,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

로 요약될 수 있는 민족자결주의는.. 기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쟁탈전이었던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패전국의 식민지를 처리하는 해법으로 제시된 (다시 말해서 당시 승전국에 속하는 일본의 식민지였던 우리나라는 해당사항이 없는) 외교적 수사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어차피 텍스트는 유한하지만 그 해석은 무한한 것이 우리네 삶이니까...

아무튼.. 이렇게 내적/외적 배경이 형성된 가운데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이 1919년 3월 3일 고종의 인산일(因山 ; 왕의 장례식을 일컫는 말)이었다. 일제에 의한 독살설이 파다한 가운데 왕의 마지막 행차를 보려고 전국 각지에서 많은 이들이 모였으니.. 큰 일을 거사하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때를 또 찾기도 힘들 것이다. 고종의 인산(장례일)은 3월 3일이었지만, 인산 당일에 거사하면 장례식에 지장을 줄 것을 우려하여 3월 2일로 하려 했으나 이날은 마침 일요일이라 기독교측의 반대로 토요일인 3월 1일로 거사일을 확정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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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전면에 선 이분은 3.1운동의 중추 역할을 했던 의암 손병희 선생이시다. 동학 3대 교주이자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한 분으로, 3.1운동 당시 각계 대표들을 규합하고 운동을 조직하였으며, 민족대표 33인의 중심이 되어 독립선언식을 이끄셨다. 결국 3.1운동 이후 투옥되셨다가 1920년 10월 병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옥고의 여독으로 1922년 5월 19일 병사하였다. 당시 선생은 62세였다.




3.1운동의 진행에 대해서는.. 이미 알려진 바도 많거니와 무수히 많은 이야기의 가지들이 존재하여 자칫 담론의 숲에서 허덕일 수 있기에, 그냥 생략한다. 일제는 3ㆍ1운동을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했는데, 화성 제암리ㆍ천안 아우내ㆍ정주 곽산ㆍ남원 광한루ㆍ익산 이리 등 전국 각지에서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는 등 학살을 저질렀다. 그리고 시위자들을 체포하여 가혹한 고문을 서슴지 않았다. 당시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3ㆍ1운동 이후 3개월 동안 시위진압과정에서 7,509명이 사망했으며, 15,961명이 상해를 입었다. 46,948명이 구금되었고,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가 소각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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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제일 안쪽에, 운동의 진행과정을 부조로 새겨놨다.

3.1운동은 성공하였는가?

목표를 "대한 독립 만세!" 로 둔다면.. 3.1운동 이후로도 독립이 되기까지 무려 20여 년, 거진 30년 가까이를 더 기다려야 했기에.. 실패라고 결론 내릴 수 있겠다. 하지만, 작게는 무서울 것 없이 날뛰었던 일제가 "어마~, 뜨거라!" 하고 (뒷날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면서 다시 미친 개로 변할 때까지) 식민지 통치방식을 '문화통치'로 바꿨으니, 이는 적지 않은 성과라 할 수 있겠으며.. 무엇보다도, 3.1 독립선언식을 이끌었던 민족대표 중 한 분 의암 손병희 선생이 했다는, 다음과 같은 말...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오.

을 보면, 운동의 목표가 독립도 아니었을 뿐더러.. 정신을 일깨운다는 면에서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겠다. 실제로 이 3.1운동은 국내 뿐 아니라 중국의 5.4운동이나 인도 간디의 비폭력ㆍ무저항 운동 등.. 세계적으로도 큰 영향을 끼친 운동이었다.


다시, 문화재 답사 본연의 자세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3.1운동과 탑골공원의 관계는 무엇인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여 3.1운동의 시작을 알린 장소가 이곳 탑골공원, 그 중에서도 구체적으로 공원 안 팔각정이다. 이 독립선언문 낭독을, 원래는 민족대표 33인이 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은 사정으로 그들은 태화관에서 낭독하는 것으로 대신했고, 탑골공원 현장에서는 학생대표가 낭독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래서일까? 이곳 탑골공원 팔각정은 문화재로, 그것도 유형문화재라는 꽤 높은 급으로 지정되어 있다.

서울시유형문화재 제73호 탑골공원 팔각정(八角亭)은 1919년 3.1운동 당시 학생들과 시민이 이 앞에 모여 학생대표의 독립선언문 낭독에 이어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시위 행진을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일제시대에는 시민들이 울적해진 심정을 달래기 위하여 이곳을 많이 찾았다고 한다. (문화재청)


오후 4시 반 경, 들어왔던 삼일문을 다시 걸어나오면서.. 짧지만 나름 임팩트 있었던 서울 도심 답사를 마무리했다.

아, 그래 삼일문!

이 이야기로.. 서울 도심답사 포스팅 전체를 마무리할까 한다.

문화재청이 최근(2017년 2월 9일이다, 지정일이. 아! 따끈따끈해라~^^)에 문화재로 지정한 것 중 하나가 '구 탑골공원 정문'(문화재자료 제68호)인 것을 보아.. 이 삼일문이 처음부터 탑골공원의 정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뭐, 아무튼 삼일문이 처음 생겼을 때.. 그 때의 현판은 한글 서예의 보급에 선도적인 역할을 했던 서예가 일중 김충현(金忠顯, 1921~2006) 선생의 글씨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런데 1967년 박정희가 자기 친필 현판으로 바꿔버린다.

이게 무슨 의미인 지 아시겠는가?

독립운동의 성지에, 그것도 대문에 친일파의 자취가 훈장처럼 내걸린 것이다.

이런.. 욕을 섞지 않고서는 언급할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무려! 2001년까지 이어졌다. 2001년의 상황도 어찌 된 것이냐면.. 참다 못한 민족단체 회원들이 11월 23일 새벽에 기습으로 철거한 것이다. 결국 이러한 퍼포먼스가 사회적 반향을 일으켜서.. 결국 박정희의 현판은 철거되고, 종로구청은 2003년 새 현판을 제작하여 걸었다. 아예 논란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새 현판은 삼일독립선언서의 글씨체를.. '삼'자와 '일'자는 따오고, '문'자는 독립선언서에 없어서 획을 따와서 조합하는 형식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결론은 해피엔딩이지만.. 과정 자체가 요새 말로 헬조선의 집약이다.

독립운동 성지에 친일파의 현판

이게 당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는가? 그런데.. 대한민국 현대사에는 그런 가치전도, 언어도단이 장난 아니게 많이 등장한다. 예컨대 이런건.. 어떤가?

공화국 수호를 위한 쿠데타
유신공주가 말하는 적폐청산

이렇게 나팔 부는 이들은 둘 중 하나다. 꼴통이거나, 단물 빠는 파리거나...

탑골공원에 들어가지 않고도.. 삼일문 앞에만 서도.. 한국 현대사의 모순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런 모순을 지금이라도 고칠 생각 없이 태극기 흔들며 여전히 빨아대니...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이 헬조선이라 하는 거다.


2017.06.05.월


탑골공원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99 탑골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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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 Source : http://m.blog.naver.com/jvj24601/221046646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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